김승희 시인이 전하는 허무에서 찾은 진정한 자유의 철학
"아무것도 없는데 자유롭다. 아무것도 없으니 자유롭다. 공허해서 울고 싶은데, 빵점이기 때문에 자유롭다." 74세의 시인 김승희가 새 시집 '빵점 같은 힘찬 자유'를 통해 전하는 삶의 아이러니다.
5년 만에 선보인 열두 번째 시집에서 서강대 국문과 명예교수인 김승희 시인은 허무와 자유가 만나는 지점에서 현대인이 놓치고 있는 진정한 해방의 의미를 탐구한다.
바니타스에서 발견한 자유의 진실
시집의 제목부터 강렬한 모순을 담고 있다. '빵점'과 '힘찬 자유'라는 상반된 개념의 결합은 현대 사회의 성과주의와 경쟁 문화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을 보여준다.
김승희 시인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성경 전도서의 구절을 인용하며 바니타스(Vanitas)의 철학을 현대적으로 해석한다. 인간의 유한함과 물질의 덧없음을 깨달을 때 오히려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허망한 것이 허망할 때, 그래서 마음껏 다 허망할 때 비약적으로 자유로워진다고 한다. 허망한 것이 충분해질 때 자유를 알게 된다고 한다" - '바니타스 아래 자유가 자란다' 중
일상에서 찾은 해방의 순간들
시인의 자유는 관념적 공허가 아니라 구체적인 일상의 경험에서 나온다. 세수도 안 하고 머리도 안 빗은 초라한 모습으로 동네를 누비다가 지인과 환하게 웃을 때, 병원에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며 계단을 뛰어 올라갈 때 느끼는 홀가분함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통찰은 성과와 외모, 사회적 지위에 매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진정한 자유는 무언가를 가져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찾아오는 것이라는 메시지다.
소외된 여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다
김승희 시인은 개인적 깨달음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약자, 특히 여성들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시집에 수록된 '분홍색 십자가 아래 이름 없는 주소 아래'는 뉴욕에서 연쇄살인범에게 목숨을 잃은 한인 예술가 차학경을 모티프로 한 작품이다.
"차학경은 불멸의 예술가라는 사실과는 상관없이 우연히 살해당한 여자, 버려진 여자, 유기당한 여자의 대명사로 남았다"며 "그것이 여성이 저항할 수 없는 약자의 운명임을 비극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시인은 설명한다.
이는 단순한 개인사를 넘어 구조적 불평등과 젠더 폭력에 대한 사회적 고발이자, 역사 속에서 지워진 여성들의 목소리를 복원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메멘토 모리, 창작의 원동력
1973년 등단 이후 50여 년간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온 김승희 시인에게 창작의 동력은 무엇일까. 그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라고 답한다.
"죽음의 불가피함과 삶의 유한함, 그것이 창작의 동력"이라는 그의 말은 허무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삶에 대한 더 깊은 애착과 집중을 의미한다. 한정된 시간이기에 더욱 소중하고, 덧없기에 더욱 아름다운 것들을 포착하려는 시인의 의지가 담겨 있다.
"꿈을 향해 나가려면 어느 정도는 미쳐야 한다"는 그의 조언은 열정과 균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그 '어느 정도'가 중요합니다. 너무 미쳐도 안 되고 너무 안 미쳐도 안 되거든요"라며 웃음을 보인다.
시대를 관통하는 젊은 정신
오은 시인은 추천사에서 "시인은 나이 들어도 시는 나이 들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고 선배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김승희 시인의 작품에서 여전히 번뜩이는 직관과 언어의 역동성을 찾을 수 있는 이유다.
그가 제시하는 시적 젊음의 비결은 좋은 독서, 신선한 언어 탐구, 시간에 대한 예민한 감각, 그리고 무엇보다 몰두하는 능력이다. 이는 창작자뿐만 아니라 변화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유효한 지혜로 다가온다.
김승희 시인의 '빵점 같은 힘찬 자유'는 성과 중심 사회에서 진정한 가치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허무에서 자유를, 상실에서 해방을 찾는 역설적 지혜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