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합의라는 이름의 폭력, 대화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길
'사회적 합의'라는 말은 언뜻 민주주의의 핵심처럼 들린다. 하지만 약자의 생존과 권리가 걸린 문제에서 이 말은 어떤 역할을 할까. 정희진 월간 오디오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은 사회적 합의가 오히려 소수자를 배제하는 교묘한 폭력으로 작동한다고 지적하며, 대화의 진짜 목적은 합의가 아니라 현실을 돌파할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 '사회적 합의'가 소수자에게 폭력이 되는가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을 흔히 '사회적 약자·소수자'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들은 국민의 절반을 훨씬 넘는다. 소수자라는 개념 자체가 지배 집단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0.1%의 사람들과 그들에게 종속된 이들이 마치 다수인 것처럼 포장된 결과다.
이재명 정부 이전까지 한국 사회의 약자에 대한 대응은 '나중에'였다. 여성, 동성애자, 장애인의 문제는 정권 교체 같은 '중요한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 다루자는 식이었다.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주장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는 시기상조인 문제가 누구에게는 당장의 생사가 걸린 사안이다. 적절한 시기란 대체 누가 정하는가.
최근에는 '나중에'보다 더 후퇴한 주장이 등장했다. 동성 혼인에 대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혼인은 이성이든 동성이든 개인의 합의가 중요하다. 조혼이나 매매혼이 아닌 이상 사회적 합의는 필요치 않다. 보편적 인권 개념이 엄연한데 약자의 권리에 사회적 합의가 왜 필요한지 의문이다. '사회적 합의'는 대화나 다수결 같은 민주주의의 이미지를 업고 '나중에' 주장보다 더 설득력 있어 보이지만, 그만큼 더 교묘하다.
인권위의 침묵이 보여주는 합의의 함정
지난 6월 13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와 우정국로 일대에서 제27회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올해 슬로건은 '교집합: 다름을 연결로'였다. 조직위원회는 '우리는 오랫동안 다름을 문제나 결핍으로 취급하는 사회에서 살아왔다'며 '각자가 선명한 자기만의 색깔을 지닌 채 서로에게 안전하게 닿기 위해 모이는 자리'라고 취지를 밝혔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인사로 국가인권위원장에 임명된 안창호는 퀴어퍼레이드와 반대 행사인 '거룩한 방파제' 모두 방문 예정이었으나 논란 끝에 양측 모두 불참했다. 인권위의 퀴어퍼레이드 공식 부스 설치 계획도 무산되었다. 합의는 이토록 어려운 것이며, 인권의 최전선에 서야 할 기관조차 이 어려움 앞에서 물러섰다.
리오타르가 말한 대화의 진짜 목적
프랑스 사상가 장프랑수아 리오타르(1924~1998)는 대화의 목적이 합의가 아니라 새로운 언어의 생성이라고 주장했다. 인간 사이의 온전한 합의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회적 몸이고, 각자 서 있는 자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서로가 양보하는 협상은 가능할지 몰라도 완전한 합의는 불가능하다. 동시에 사회 구성원 간의 평등은 합의 사항이 될 수 없다.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당위이지 합의할 사안이 아니다.
리오타르에게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방법론은 합리성에 기초한 설득이 아니라 새로운 규칙을 채택하는 것이었다. 대화 참여자들마다 각자 다른 방법과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후기 구조주의 사상가들은 하버마스가 주장하는 합리적 이성이나 공론장 개념을 믿지 않는다. 대화에서 가능한 것은 국지적 합의뿐이다. '지금, 여기'에서 '현재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들 간의 합의만 가능하며, 이것도 일시적이고 언제든 철회될 수 있다.
불일치에서 탄생하는 새로운 언어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사회에서는 기존 서사로 대화가 어렵다.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의 조건'이 1979년에 출간되었으니, 50여 년이 지난 오늘날 AI 시대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절대 진리로 간주되었던 기존 과학은 다른 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상대화된다. 그는 새로운 언어가 언제나 불일치로부터 탄생한다고 주장했다. 폐쇄된 커뮤니티에서 전문가들끼리의 상동성이 아니라 새롭게 등장하는 발명가들의 배리(paralogie)가 중요하다. 'para/logie'를 단순히 배리나 역설로 번역하기보다는, 다른 논리가 함께 거처하는 상황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불일치의 긴장이 사회의 생명력이다.
'사회적 합의'나 '국민적 합의'는 그럴듯해 보이고 심지어 독재의 반대말 같다. 하지만 문제는 사회적 합의에 누가 참여하는가이다. 끝내 사회적 합의가 불가능한 사안도 있고, 그럴 필요가 없는 이슈도 얼마든지 있다. 개인의 사랑과 가족을 구성할 권리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사안이 아니다. 이때 사회적 합의를 강조하는 행위는 전체주의다. 사회적 합의는 약자와 소수자를 억압하기 위한 핑계며 '나중에'보다 교묘해진 폭력이다.
적대의 언어를 넘어설 새로운 발상이 필요한 이유
최근 친여 유튜버 최욱은 극우 온라인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저장소'를 향해 '탱크로 밀어버려야 한다'고 발언해 논란이 일자 사과했다. 그러나 '극우들에게 하는 사과는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이런 행보는 심각한 문제다. '탱크'에 '탱크'로 대응하겠다는 것은 공멸의 지름길이다.
대화는 합의도 맞대응도 아닌 제3의 목소리를 모색하는 것이다. 교착 상태에 있던 언설의 자장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과 모색, 그것이 대화다. 모든 대화는 기존 논리를 뛰어넘는 변증을 위한 것이다. 서로의 차이와 적대를 확인하고 증폭시키는 대화는 왜 필요한가.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차별 문제에는 새로운 발상이 필요하다. '여성우위 시대다, 동성 혼인은 가정 파괴다, 장애인 이동권 운동이 비장애인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과 반박이 반복된다면 아무리 협상 테이블에 앉아도 차별과 갈등은 해결되지 않는다.
물론 약자의 목소리를 억압해온 세력과 이에 저항하는 세력의 입장이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전자는 특별한 노력 없이도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지만 후자는 새로운 언어가 절실한 집단이다. 이 비대칭을 해결하려면 기존 익숙한 목소리를 반복하는 사회적 합의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모색하기 위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인권은 합의의 대상이 아니다
동성 혼인에 대한 극우 세력의 주장인 '남자 며느리, 여자 사위가 웬말이냐'는 그들이 걱정할 일이 아니다. '며느리'와 '사위'는 가부장제 사회가 규정한 특정 성에 대한 역할 규범일 뿐 원래 정해진 가족 구성원도 아니고 인간의 조건은 더욱 아니다. 사회적 약자 이슈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강조하며 인권을 묵살하는 것보다 더 절망적인 것은 없다.
지식의 형태는 사람들마다 다르게 인식된다. 어떤 사람에게는 규칙적이고 일관된 것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연속이고 모순적이다. 기존 과학이나 전통적 지식은 전체 지식을 대표하지 않는다. 무엇이 지식인지를 누가 결정하고 무엇을 결정해야 하는지를 누가 아는가에 대한 문제제기는 항상적인 인간의 조건이다.
모든 문제에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면 어떤 일도 진전이 없을 것이다. 정작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고 집행해야 할 일에는 침묵하면서 약자의 생존이 걸린 문제에 사회적 합의를 강조하는 것은 그들을 사회의 성원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추방의 선동이다.
동성애 혐오를 외치는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혐오 행위 자체도 있지만 자신의 언어는 절대자가 부여했기에 증명할 필요가 없는 자명한 진실이라는 오만과 착각이다. 자신은 하느님으로부터 말씀을 부여받았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믿음은 이단이다. 예수의 사상과 민주주의의 공통점은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화의 목적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대화가 사회적 합의를 위한 것이라는 통념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대화가 생산적이기 위해서는 합의가 아니라 현실을 돌파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 불일치의 긴장 속에서 새로운 규칙을 모색하고, 기존의 논리를 뛰어넘는 변증을 시도할 때 대화는 비로소 사회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사회적 합의는 언제 폭력이 되는가?
사회적 합의는 기본권과 인권에 해당하는 사안, 즉 개인의 사랑과 가족 구성의 권리, 차별받지 않을 권리 등에 요구될 때 폭력이 된다. 이러한 권리는 당위이지 합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약자의 생존권을 다수결의 판단에 맡기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전체주의적 배제다.
리오타르가 말한 '새로운 언어'란 무엇인가?
리오타르가 말한 새로운 언어는 기존의 합리적 설득이나 합의가 아니라, 불일치와 긴장 속에서 탄생하는 새로운 규칙과 담론이다. 서로 다른 논리가 병렬하는 상태, 즉 배리(paralogie)를 통해 기존 지식의 권위를 해체하고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여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나중에' 논리는 어떻게 작동했는가?
한국 사회에서 '나중에' 논리는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의 권리 요구를 정권 교체나 경제 성장 같은 '더 중요한' 의제 뒤로 미루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이재명 정부 이전까지 이 논리는 약자의 당장의 생사를 구조적으로 지연시키는 기제로 기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