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시대 법리 넘어선 인권의 목소리, 동의 없는 성폭력·장애인 이동권 재판소원 통과
법원의 보수적 판결로 고통받은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헌법재판소의 문을 두드리게 됐다. '동의 없는 성폭력' 피해자와 장애인 이동권 침해 피해자가 각각 청구한 재판소원이 사전심사를 통과하며, 구시대적 법리를 넘어선 인권 보장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지 주목된다.
'동의 없는 성폭력', 주목받는 동의의 의미
성범죄 피해자 A씨는 가해자가 75차례나 거절 의사를 표시했음에도 유사강간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러나 수원지법은 작년 6월, 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이나 협박이 입증되지 않았다며 1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항소심에서도 같은 판단이 유지됐고, 검사의 상고 포기로 무죄가 확정됐다.
A씨는 법원의 재판으로 성적 자기결정권과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침해당했다며 재판소원을 청구했다. 성범죄 인정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피해자의 동의 여부인데, 법원이 종래 대법원의 태도에 따라 폭행과 협박의 정도를 엄격히 따진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이다. 유사강간죄 성립을 위해 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과 협박이 있어야 한다는 '최협의설'은 더 이상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성범죄 인정에서 가장 중요한 판단기준은 성행위에 대한 피해자의 동의 또는 의사가 있었는지 여부입니다. 그럼에도 법원이 유사강간죄의 인정을 위한 폭행·협박의 정도에 관해 종래 대법원의 태도에 따라 무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이 사건의 쟁점을 짚으며, 무죄 확정 판결을 받은 피고인의 법적 안정성과 피해자에 대한 효과적 사법보호 청구권 사이의 충돌을 언급했다. 피해자의 기본권과 피고인의 일사부재리 원칙, 무죄추정 원칙 등 기본권 내용과 보호 범위, 그리고 피해자가 제기한 무죄확정 판결에 대한 재판소원의 허용 범위 등을 전원재판부에서 검토할 예정이다.
이사 갈 때마다 소송해야 하는가, 장애인 이동권의 현실
휠체어를 이용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지체장애인 B씨의 사연도 헌법의 심판을 받게 됐다. B씨는 2014년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하라며 버스회사와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1심과 2심은 탑승설비 미설치가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차별행위라며 모든 노선에 휠체어 탑승 설비를 설치하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2022년 업체의 영업 상황 등을 감안해 의무 이행 범위를 원고들이 향후 탑승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개연성이 있는 노선으로 한정했다. 파기환송심은 B씨가 출퇴근과 가족 방문 등에 이용하는 일부 노선에만 설치를 명했고, 대법원은 지난 4월 상고를 심리불속행 기각했다.
B씨는 법원의 판결이 청구인의 이동권과 평등권을 침해했다며 재판소원을 냈다. 이사를 가거나 직장을 바꿀 때마다 새로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는 것은 실효적 권리구제를 보장하는 재판청구권을 침해하는 부조리라는 것이다.
거주·이전의 자유, 직업의 자유를 행사할 때마다 다시 위법한 차별 상태를 감수하고 새로운 권리구제 절차를 밟게 하는 부조리는 실효적 권리구제를 보장하는 재판청구권을 침해하는 것입니다.
헌법재판소 역시 B씨의 상고를 심리불속행 기각한 것이 기본권을 침해하는지 여부를 전원재판부에서 검토할 계획이다. 심리불속행 기각은 형사 사건을 제외한 소송에서 2심 판결에 중대한 법령 위반이 없으면 심리를 속행하지 않고 상고를 기각하는 제도다. 앞서 재판소원 시행 후 처음으로 사전심사를 통과한 녹십자 백신 입찰담합 사건 역시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인한 재판청구권 침해가 쟁점이다.
인권 보장의 새로운 창, 재판소원
이번 2건의 사전심사 통과로 지난 3월 12일 재판소원 시행 이후 누적 8건이 전원재판부에 회부됐다. 전날까지 접수된 877건의 재판소원 가운데 736건은 각하된 상황이다. 그만큼 엄격한 심사를 거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피해자들이 법원의 확정 판결을 뒤집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보수적 법리에 갇힌 피해자들의 인권을 구제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로서, 헌법재판소의 전원재판부 결정이 사회적 진보와 평등을 어떻게 이끌어낼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