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민복, 13년 만의 신작 '물빛인쇄소'…시는 마음의 길을 내는 일
한국 현대시의 독보적인 목소리, 함민복 시인이 13년 만에 새 시집 '물빛인쇄소'를 들고 돌아왔다. 전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이후 6번째 시집으로, 창비에서 출간됐다. 1988년 '성선설'로 등단한 이후 38년간 꾸준히 사유의 깊이를 더해온 그는 이번 시집에서 삶과 죽음, 문명과 AI, 자연과 공감이라는 시대적 화두를 따뜻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으로 풀어낸다.
삶과 죽음, 모래시계처럼 순환하는 운동
새 시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주제는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이다. 시인은 '죽은 나무'라는 시에서 베어버리려다 그냥 둔 죽은 나무가 오히려 죽음으로써 '잠시 머물러 있음인 삶을 비춰'주는 존재라고 노래한다. 죽은 나무는 거미가 집을 짓고 새가 쉬어 가는 또 다른 생명의 터전이 된다.
시인에게 삶과 죽음은 대립이 아니다. '삶과 죽음은 모래시계, 끝나지 않는 키스'라는 시에서 그는 삶과 죽음이 끊임없이 맞물려 순환하는 하나의 운동임을 형상화한다. 2년 전 심장 시술을 받은 경험은 이러한 인식에 결정적 계기가 됐다. 시인은 '지병이 생기니 죽음을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오히려 불안에서 벗어나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말했다.
AI 시대, '방향의 독재자'를 경계하다
함민복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인공지능(AI)에 대한 비판적 시선도 놓치지 않는다. '장미와 AI'라는 시에서 그는 AI가 모든 과정을 압축하고 생략해 단 하나의 답을 제시하는 '방향의 독재자'로 군림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시인은 '하나로 수렴될 수도 없고 단순화할 수도 없는 일들이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벌어지고 있다'며 AI에 무분별하게 익숙해지면 오히려 삶의 질이 낮아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지난한 탐색과 시행착오, 예상치 못한 길과의 조우가 진정한 사유를 열어준다고 강조한다.
자연과의 교감, 30년 강화도 살이의 결실
표제작 '물빛인쇄소'는 강화도의 잔잔한 바다에서 영감을 받았다. 시인은 '잔잔 잔잔 제 몸을 구부려 반짝 반짝 빛을 출력하는 바다'라는 이미지로 자연과 인간의 교감을 노래한다. 올해로 강화도 살이 30년을 맞은 그는 강화도의 역사와 장소를 주제로 한 시집도 계획 중이라고 밝혔다.
문학평론가 송현지는 해설에서 '함민복이 지키려는 것은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상이한 방향이 서로 부딪히고 얽히며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열어젖히는 탐색의 시간 그 자체'라고 평했다.
시는 마음의 길, 공감의 꽃을 피우다
함민복 시인에게 시란 무엇일까. 그는 '시인이란 마음의 길을 내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시는 마음의 길을 내는데 새로운 길을 내는 것은 아니에요. 상대방에게도 이미 있는 것이라야 마음을 이을 수 있는 것이죠. 그렇게 마음과 마음이 만나 꽃을 피우는 순간이 공감인 것 같습니다.'
그는 문학을 하는 이유에 대해 '누군가와 소통하고 그 소통을 통해서 그래도 지금보다는 희망적인 세상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언어를 통해 생각의 결을 열어주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라는 그의 신념은 이번 시집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함민복의 '물빛인쇄소'는 자본주의 사회의 이면과 소외된 삶, 자연과 문명, 그리고 AI 시대의 인간적 가치를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13년의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이번 시집은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이다.
함민복 시인, '물빛인쇄소' FAQ
함민복 시인의 새 시집은 언제 출간됐나?
시집 '물빛인쇄소'는 2026년 7월 30일 창비에서 출간됐다. 전작 이후 13년 만의 신작이다.
이번 시집의 주요 주제는 무엇인가?
삶과 죽음의 순환, AI와 문명에 대한 비판적 성찰, 자연과의 교감, 그리고 인간적 공감이 핵심 주제다.
시인은 AI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나?
함민복 시인은 AI가 과정을 압축하고 생략해 단일한 답을 제시하는 '방향의 독재자'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하며, 다양한 사유와 탐색의 시간을 강조한다.
시인이 강화도에서 산 지 얼마나 됐나?
올해로 강화도 살이 30년을 맞았다. 강화도의 자연과 역사는 그의 시적 영감의 중요한 원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