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 류영모(1890~1981)의 사상을 평생 연구하고 알려온 박영호 전 다석학회 고문이 10월 11일 오후 7시 39분 향년 90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족이 별세 소식을 전했다고 한겨레가 보도했다. 고인은 부고도 알리지 말고 빈소도 차리지 말며 부의금도 받지 말라는 유지를 남겼고, 묘역조차 남기지 않으려 했으나 유족과 제자들의 뜻에 따라 수원 연화장 공원묘역에 작은 이름표 하나만 남았다.
경향신문이 전하는 고인의 삶은 한국 현대 사상사에서 좀처럼 보기 어린 구도행이었다. 고인은 다석에게서 '마침보람', 곧 오늘날의 졸업장을 직접 받은 유일한 제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증명은 학문을 마쳤다는 표창이 아니었다. 스승에게 매달리지 않고 홀로 진리를 깨쳐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스승이 제자에게 준 가장 귀한 선물은 가르침이 아니라 독립이었던 셈이다.
전쟁의 상처에서 시작된 구도길
고인의 물음은 1950년 한국전쟁에서 시작되었다.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한 그는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고, 불면과 신경쇠약이 뒤따랐다. 죽음이 무엇인지, 인간은 왜 사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톨스토이의 '참회록'이었고, 이후 동서양 종교철학을 탐독했다.
1956년 '사상계'에 실린 함석헌의 글을 읽고 그에게 편지를 쓴 것이 인연이 되어 천안 씨알농장에서 약 3년 동안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공부했다. 1959년 서울 YMCA 연경반에서 다석의 금요강의를 듣기 시작했고, 경기도 의왕 청계산 자락 황무지 6천여 평을 개간하며 몸은 땅을 일구고 얼은 하늘을 우러렀다.
그러나 1965년 다석은 뜻밖에도 단사(斷辭), 다시 찾아오지도 말고 편지도 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스승의 말씀을 되풀이하는 제자로 남지 말고 스스로 깨치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었을 것이라고 경향신문은 전했다. 고인은 홀로 5년의 사색 끝에 1970년 '새 시대의 신앙'을 펴냈고, 다석으로부터 마침보람이라는 답을 받았다.
다석을 다시 세상에 낳은 기록의 일생
마침보람 이후 고인에게 주어진 과업은 다석 전기였다. 1971년부터 스승의 생애와 사상을 기록하기 시작해 1985년 '씨ᄋᆞᆯ 다석 류영모의 생애와 사상'을 펴냈고, 이후 '다석전기, 류영모와 그의 시대' 등으로 다석 연구의 기초 문헌을 쌓았다. 특히 1990년대 문화일보에 다석 사상을 325회에 걸쳐 연재하며 낯설던 다석의 한글철학을 대중에게 끌어냈고, '다석사상전집' 전 7권과 어록, 명상록 등을 엮었다.
고인의 가장 큰 학문적 업적은 다석사상을 종교 혼합이 아닌 '일원다종교주의'로 읽어낸 데 있다. 예수와 석가, 공자와 노자가 서로 다른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길에서 하나의 근원을 우러른다는 이해다. 고인은 이 근원을 '제나', '몸나', '얼나'의 뜻말로 풀어냈다. 제나는 욕망과 소유에 매인 나요, 얼나는 하늘 얼을 받아 솟나는 참나다. 고인은 이를 관념이 아니라 하루를 하나의 일생으로 살아가는 일일일생(一日一生)과 하루 한 끼, 죽음 공부 같은 실천과 함께 가르쳤다. 연합뉴스는 고인이 다석의 정신을 지키고 이은 대표적 제자였다고 전했다.
다석학파의 미래는 무엇인가
고인의 별세는 한 사람의 죽음에 그치지 않는다. 다석에게 직접 배운 세대가 사라진 자리가 비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경향신문 기고에 따르면 지금은 자연의학과 농사, 몸성히의 실천을 이어가는 임락경 목사가 증언자로 남아 있다.
이제 남은 과제는 분명하다. 고인이 평생 수집한 다석 친필 일지와 서신, 강의 노트, 구술 채록, 저술 초고 등을 조사하고 디지털로 보존하는 '박영호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일이다. 나아가 다석에게서 함석헌으로, 김흥호와 이정호로, 박영호로 이어지는 사상의 흐름을 학문적으로 밝혀 살아 있는 '다석학파'의 토대를 세워야 한다. 이는 한 사상가의 기록을 넘어 한국 근현대 종교철학의 사료를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죽음을 앞두고 이름조차 남기지 않으려 했던 고인은 그러나 이름보다 오래 남을 말씀의 길을 닦았다. 흙을 일구며 얼을 키웠고, 스승의 말씀이 사라지지 않도록 평생 글을 썼다. 몸나는 흙으로 돌아갔으나 그가 밝힌 얼나의 길은 남아 있다. 마침은 끝이면서 새로운 시작이다. 이제 후학들이 새로운 마침보람을 받을 차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