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롱숏 희극과 고통의 개별성: 새로운 윤리 기준을 찾아서
21세기 4분의 1이 지나는 시점에도 여전히 야만적인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스라엘과 미국의 이란 공격으로 중동이 전화에 휩싸인 현실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연 우리는 어떤 윤리적 기준으로 이 시대를 바라봐야 할까?
롱숏 희극의 함정
찰리 채플린은 말했다. "인생은 클로즈업으로 보면 비극이지만, 롱숏으로 보면 희극이다." 이는 근대성의 낙관주의를 담은 위로의 말이다. 산업혁명 이후 지속된 발전 서사가 우리 일상 경험의 기축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란 남부 미나브시에서 미군 미사일 공격으로 사망한 초등학생 175명의 현실 앞에서 이런 관점은 무력해진다. 교실에서 오전 수업을 받다 세상을 떠난 아이들의 고통을 단순히 "롱숏 희극"의 한 에피소드로 치부할 수 있을까?
고통의 개별성과 윤리
구약의 욥 이야기는 이런 딜레마를 잘 보여준다. 욥이 잃은 열 명의 자녀가 다시 열 명의 자녀로 "보상"되는 결말에서 우리는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바로 기쁨과 고통의 개별성이다.
한 개체가 지닌 대체 불가능한 고유성이 인지되지 않을 때, 인간은 숫자로만 존재하게 된다. 비극의 개별성은 클로즈업이 있어야 생겨나며, 이것이 윤리의 출발점이다.
문학이 제시하는 새로운 관점
김숨의 소설 「잃어버린 사람」(2023)은 1947년 9월16일 부산에서 벌어진 일들을 통해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 100여 명의 등장인물로 채워진 모자이크 서사는 클로즈업과 롱숏을 동시에 구현한다.
이 작품에서 슬픔과 고통은 그 자체로 행복이 된다. 지상을 떠나며 삶을 돌이켜보는 시선에서 볼 때, 기쁨과 슬픔으로 얼룩진 유일무이한 삶 자체가 기적이자 행복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윤리적 기준을 향해
중동 전쟁은 우리에게 먼 곳의 일이라 롱숏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국제 유가 때문에 요동치는 주식 시장을 걱정하고, 또 다른 행패를 우려한다. 하지만 사람다움이 없으면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통의 개별성이 없는 곳에 윤리는 존재할 수 없다. 전쟁을 바라보는 국제정치적 리얼리즘도, AI 군사 무기화에 대한 전망도 전쟁을 롱숏 희극의 에피소드로 만들어버린다.
우리가 지켜야 할 인간 윤리의 기준은 175명 아이들의 죽음 위에, 힘을 과시하는 자의 낄낄거리는 표정 위에, 클로즈업된 고통의 개별성 위에 있어야 한다. 이들은 모두 근대성의 낙관주의가 덮어쓸 수 없는 윤리의 얼룩들이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우리 사회는 이런 윤리적 성찰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모색해야 한다. 개별 존재의 고유성을 인정하고, 고통에 공감하는 것에서부터 새로운 희망이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