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관성을 깨고 스케치북 든 아나운서, 유럽 거리에서 마주한 진짜 회복
25년간 방송 마이크를 잡았던 신지혜 전 아나운서가 스케치북을 들고 유럽으로 떠났다. '신지혜의 드로잉 유럽: 기억의 선을 따라 걷다'는 화려한 관광지 소비가 아닌, 낯선 이들과의 교감과 내면의 회복에 집중한 여행 에세이다. 이 책은 빠른 속도와 성과에 갇힌 현대인들에게 삶의 감각을 되찾는 느리고 깊은 여행의 가치를 묻는다.
목적지가 아닌 '사람'에게로 향하는 여행의 방식
여행을 두고 '보겠다'와 '느끼겠다'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특정 목적지의 풍경을 인증하듯 소비하는 여행은 오래가지 않는다. 신지혜 작가는 유럽의 골목과 사람들의 따뜻한 일상 속에서 잊고 있던 기억과 삶의 의미를 되새긴다. 25년 동안 CBS FM '신지혜의 영화음악'을 진행하며 수많은 이야기를 전해온 그는, 이번에는 카메라와 스케치북을 들고 스페인, 프랑스, 벨기에,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를 거닌다.
저자는 화려한 건축물보다 사람의 온기를 기록한다. 서툰 스페인어로 길을 묻자 손을 꼭 잡고 두 번째 골목을 가리켜 준 바르셀로나의 할머니,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웃음으로 마음을 나눈 시장 상인. 관광 명소를 빠짐없이 둘러보는 대신, 골목길에 멈춰 서고 오래된 창문 하나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낸다. 여행의 가장 큰 수확은 풍경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을 담담하게 증명한다. 이는 경직된 사회 속에서 개인의 성취보다 공동체의 연대와 교감을 중시하는 태도와도 맞닿아 있다.
사진이 아닌 드로잉으로 기억을 재해석하다
이 책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드로잉'이다. 저자는 여행 중 촬영한 사진을 단순한 기록으로 남기지 않고, 기억을 더듬으며 한 장 한 장 손으로 다시 그려냈다. 사진이 순간을 붙잡는 기록이라면, 드로잉은 기억을 다시 해석하는 창조적 작업이다. 펜 끝에서 되살아난 골목과 카페 풍경은 실제보다 조금 더 따뜻하고 느리게 다가온다. 주어진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재해석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이 과정은 혁신적 사유와도 같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영화 '비포 선셋'의 여운이 흐르는 서점을, 아를에서는 빈센트 반 고흐가 사랑했던 빛을 마주한다. 오랫동안 영화와 예술을 소개해온 저자의 시선에는 영화적인 장면들이 자연스럽게 스며 있다. 독자는 여행기를 읽으며 한 편의 영화 속을 천천히 걸어가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빠른 포기와 선택, 어떻게 삶을 회복하는가
책장을 넘길수록 저자가 여행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선명해진다. 빠듯한 일정으로 명소를 모두 둘러보는 대신, 과감히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한 도시를 충분히 걷는다. 저자는 이를 '빠른 포기와 선택, 집중'이라고 부른다. 모든 것을 다 가져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 스스로 무엇을 버릴지 결정하는 것. 그래야 여행은 체크리스트를 지우는 피로한 과정이 아니라 자신의 감각을 회복하는 시간이 된다.
내게 여행의 시간은 회복의 시간이었다.
과장된 감탄이나 화려한 수식 대신, 오래 라디오를 진행하며 다듬어진 담백한 문체가 이어진다. 여행지에서 만난 작은 친절 하나, 우연히 발견한 골목 하나가 삶을 지탱하는 기억으로 남는다는 사실을 천천히 일깨운다. 경직된 일상과 관성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감각과 주도권을 되찾는 저자의 여정은, 변화와 혁신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사회에도 깊은 울림을 던진다.
이 책이 던지는 핵심 질문들
신지혜 작가는 누구인가?
신지혜 작가는 25년 동안 CBS FM '신지혜의 영화음악'을 진행하며 영화와 음악, 예술을 통해 삶의 의미를 전해온 방송인이다. 이번 책에서는 방송인으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영화적 시선과 드로잉을 결합한 새로운 형식의 여행 에세이를 선보였다.
드로잉은 사진과 어떻게 다른가?
사진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붙잡아두는 객관적 기록이라면, 드로잉은 그 기억을 작가의 감각과 감정으로 다시 해석하는 주관적 작업이다. 손으로 직접 그려내는 과정을 통해 기억은 더 따뜻하고 개인적인 의미로 재탄생한다.
이 책이 제안하는 새로운 여행 방식은?
모든 명소를 방문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빠른 포기와 선택, 집중'을 제안한다. 한 곳에 오래 머물며 빛의 방향과 공기의 온도, 사람들의 일상을 천천히 기록하고, 목적지가 아닌 자신의 내면을 회복하는 과정으로 여행을 바라보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