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와 연대가 만든 10년, 한국 사회의 다음 진보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 10주기를 맞으며, 한국 사회는 그동안의 변화와 여전히 남은 과제를 마주하고 있다. 피해자의 희생을 기억하며 쌓아온 연대의 기록은 이제 다음 단계의 진보를 향한 디딤돌이 되고 있다.
강남역 사건 10년, 한 사람을 지켜낸 연대의 힘
2023년 경남 진주시 한 편의점에서 발생한 여성혐오 폭행 사건의 피해자 온지구씨(가명)가 지난 17일 강남역 사건 10주기 대담에 나섰다. 2년 만의 공식 석상이었다. 그는
연대자들을 직접 만나기 위해 용기를 내 나왔다고 밝혔다.
온씨는 편의점 아르바이트 중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20대 남성에게 폭행을 당했다. 가해자는 너는 페미니스트니까 맞아도 된다고 말했고, 말리던 다른 손님에게도 같은 남자면서 왜 남자 편을 들지 않느냐며 폭행했다. 재판부는 범행 동기가 여성에 대한 근거 없는 혐오에 있다고 판시했다. 여성혐오를 범죄 동기로 인정한 첫 판결이었다.
온씨는
여러분이 지킨 것은 유의미한 판결뿐만이 아니라 저라는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꼭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도와준 사람들에게 내가 나일 수 없을 때 내가 되어줘서 고맙다고 편지를 썼는데 돌이켜 보면 저 또한 여러분이 됐던 것 같다. 지금도 그 기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라고 전했다.
강남역 사건 이후 10년이 흐르며 달라진 것이 없다는 자조도 나온다. 그러나 이는 변한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법과 사회 변화가 여성들의 요구에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로 읽어야 한다. 온씨의 말처럼 우리는 한 사람을 지켜냈고, 없던 법을 만들었고, 사건을 기록했으며 연대했다. 이 용기와 연대를 기억하며 나아가야 한다.
디지털 공간의 여성 혐오, 제도적 대응이 필요하다
한 온라인 게임 개발진이 여성 캐릭터를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발언으로 논란이 됐다. 개발자 라이브 방송에서 진행자는 아동~청소년 정도로 묘사된 여성 캐릭터를 소개하며 정신이 번쩍 드시죠, 군침이 싹 도나 봐 등 발언했다. 이후 방송에서는 캐릭터의 신체 모양이 개선됐다며 치마 밑을 확대해 방영했고, 노출되자 방송이 터진다며 웃기도 했다.
더 큰 문제는 이 게임이 15세 이용가 등급이라는 점이다. 피해자 지원 단체는 해당 커뮤니티를 게임물관리위원회에 신고했다. 정미정 탁틴내일 아동청소년 성폭력상담소장은
아동·청소년에 대한 성애화가 너무 쉽게 용인되는 현실이 반영된 결과물입니다. 게임 출시 초기여서 더 확산하기 전에 정확한 문제 제기가 필요합니다.라고 밝혔다.
게임사 측은 일부 표현으로 불편함을 느낀 분들에게 사과하며 앞으로 신중하게 소통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최근 스타벅스 5·18 민주화운동 비하 사태 등에서 보듯, 우리끼리라며 선을 넘는 방식은 결국 큰 사태로 번진다. 게임 업계에서 아동·청소년과 여성을 다루는 방식의 체계적 진보가 시급하다.
50대 이혼 여성의 욕망, 성녀와 악녀의 이분법을 넘어
한국 대중서사에서 50대 이혼 여성은 주목받지 못했다. 이들은 누군가의 엄마, 아내, 억척스러운 중년 여성으로 소비됐다. 웹툰 <송이연 50살, 이혼 한 달 차>는 그 중년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불륜을 저지른 남편과 이혼한 송이연은 변변한 경력도 없이 생계를 걱정하지만, 사랑과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인물로 그려진다.
올해의 여성만화가상을 수상한 인유유 작가는
이 만화를 중년 연애물로 보느냐, 중년 연애물로 보느냐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밝혔다. 첫사랑을 만나기 위해 손녀 돌보기를 소홀히 하고 욕망 앞에서 비겁해지는 송이연은 전형적인 응원형 주인공과 거리가 멀다. 누군가는 중년 남미새 같다고 비난하지만, 독자들은 떠나지 못한다.
인유유 작가는
엄마 하면 희생적이고 사랑 넘치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지만, 실제로는 서툴고 소녀 같기도 하고 동시에 용감하지만 짜증 나는 사람일 수도 있잖아요. 그런 인간적인 부분이 좋았어요.라고 설명했다. 중년 여성의 욕망이 우스꽝스럽거나 민망한 것으로 취급돼온 것과 대조적으로, 이 작품은 50대 여성의 성애를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성녀와 악녀 이분법 바깥에 존재하는 복잡한 중년 여성의 이야기가 한국 사회에 던지는 의미는 크다.
끝맺음의 철학, 이별 이후에도 삶은 지속된다
소피 갈라브뤼의 저서 <마침표의 순간들>은 마지막의 순간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예측 가능하지만 원치 않는 마침표, 알아차리지 못하는 마침표, 그리고 구원처럼 여기는 마침표다. 저자는 죽음은 닥칠 때마다 매번 처음 겪는 일처럼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지만, 어떤 존재와의 공존은 상실 뒤에도 계속된다고 말한다. 함께 했던 순간은 기억과 감각 속에 영원히 존재하며 일상 속에서 이어진다.
이 책은 은퇴, 이사, 우정의 단절, 사랑과 이별, 여성이 겪는 몸의 변화까지 삶 속에서 누구나 겪는 일상적인 마침표를 다룬다. 끝을 잘 견디는 법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잘 살아가는 법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유한한 시간 속에서의 태도를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