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남자들의 세계'였던 건축업계에 뛰어들어 30년 넘게 설계 현장을 지켜온 박유정 건축사(59)가 자신의 이름을 건 건축사사무소 개소를 준비하며 커리어의 '또 다른 10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박 건축사는 한국여성건축가협회 감사로도 활동하며 후배 여성 건축인들의 멘토를 자처하고 있다.
경향신문은 지난달 20일 서울 서초구 한국여성건축가협회 사무실에서 박 건축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의 커리어와 철학을 전했다. 그의 이력은 거의 10년 단위로 이어진다. 1991년 건축공학과를 졸업한 뒤 설계사무소와 건설사를 거치며 사원에서 임원까지 올랐고, 그 사이 건축사 자격증(2000년), 석사(2004년)와 박사(2015년) 학위, 두 번의 출산이 자리한다.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박 건축사는 건축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라고 표현했다.
건축은 건축주나 발주처의 요구사항을 바탕으로 아무것도 없는 대지 위에 새로운 공간과 형태를 구상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건축가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생각이 도면으로, 실제 건축물로 완성되지요.
임신 중 들은 말에 되받아쳐야만 했던 시절
건축업계는 대표적인 남성 중심 분야로 꼽힌다. 박 건축사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1990년대는 여성이 결혼하면 직장을 그만둬야 한다는 인식이 지배하던 때였다. 그는 회사 최초의 여성 직원으로서 커피 심부름과 복사, 경리 업무를 3년간 떠안으면서도 본업을 병행해야 했다.
임신 중에는 사장님에게 '배가 나와서 도면이나 제대로 그리겠냐'는 말을 들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전했다.
배 들어가게 개월 수에 맞춰서 제도판 좀 깎아주세요.
결혼식 전날까지 철야하고, 출산 병원을 회사 도보권으로 잡았던 것도 '여자도 결혼하고 계속 일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여성성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치마를 아예 입지 않았고, 직장에서 집이나 아이 이야기를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부장이 된 뒤에야 치마를 입었고, 팀원들에게 '나는 남을 테니까 가서 자기계발을 하라'며 남자 관리자들과 다른 리더십을 보여줬다.
판교 제2테크노밸리, 가장 자랑스러운 프로젝트
박 건축사가 가장 자랑하고 싶은 프로젝트는 판교 제2테크노밸리 벤처타운이다. 스타트업을 육성해 중소기업, 대기업으로 성장시키자는 취지의 이 프로젝트에서 그는 3개 획지 중 하나를 박빙으로 따내 50억원을 수주했고, 작년에 완공을 맞았다. 혁신육아복합센터, 육군종합행정학교, 병원 등의 프로젝트도 맡았다.
건설사에서는 턴키(설계·시공 일괄입찰) 제도가 유행하던 2000년대 중반 PM(프로젝트 매니저) 역할을 맡아 설계에서 공사까지 프로젝트 전체를 관리했다. 그는 '내가 맡은 것'만 보면 당선되기 어렵다며 프로젝트 전체를 보는 태도를 후배들에게 강조한다.
후배 여성들에게: 꿈과 직업은 다릅니다
박 건축사는 롤모델이 없었다고 돌아본다. 오히려 임신한 직원, 결혼 후에도 계속 근무하는 여성이 모두 '회사 최초'였다. 그런 경험 때문인지 그는 이제 수많은 후배들의 멘토를 자처한다.
선배가 조금 팁을 주면 굉장히 쉬워지는 거예요. 내가 길잡이를 해주면 젊은 후배들이 빨리 나아갈 수 있겠구나, 나를 뛰어넘을 수 있겠구나 다짐했습니다.
건축을 꿈꾸는 후배 여성들에게 그는 '꿈과 직업은 다르다'고 조언한다. 꿈은 행복이지만 직업은 스트레스이며, 그 스트레스를 견뎌야 꿈을 향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 3년은 무조건 공부하는 자세로 무엇이든 다 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건축사 자격 역시 3~4년 차에 서두르지 말고 7~10년 차쯤 프로젝트 경험을 쌓은 뒤 도전하라고 권한다. 그 역시 9년 차에 시작해 10년 차에 자격을 땄다.
다음 10년: 에이징 인 플레이스를 위한 공간
박 건축사는 2년쯤 전부터 저출생·고령화 도시 세부시설 관련 자문 요청을 받으며 새로운 방향을 찾고 있다. 어머니가 낙상으로 고관절 부상을 입은 경험이 계기가 됐다. 그는 고급 실버타운과 저소득층 임대주택 사이의 '중간'이 없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의 발병을 늦추고 경제에 오래 기여할 수 있도록 선순환을 이끄는 공간, 그리고 원래 살던 곳에서 나이들어 가는 '에이징 인 플레이스'를 위한 정책 제안이 그의 다음 목표다. 간호사가 되려던 꿈이 사람을 돌보는 공간으로 운명처럼 이어졌다고 그는 말했다.
무에서 유를 만드는 건축처럼, 그의 다음 10년도 이제 막 기초공사를 시작했다. 그는 11년째 대학(원) 강의와 한국여성건축가협회 감사 역할을 병행하며, 자신의 이름을 건 사무소에서 30년간 축적한 아이디어를 정리해 나갈 계획이다.
자주 묻는 질문
박유정 건축사의 대표 프로젝트는 무엇인가요?
판교 제2테크노밸리 벤처타운입니다. 박 건축사는 3개 획지 중 하나를 따내 50억원 규모로 수주했으며, 작년에 완공됐습니다.
박유정 건축사는 여성 건축가를 위해 어떤 활동을 하나요?
한국여성건축가협회 감사로 활동하며, 11년째 대학(원)에서 건축학도를 가르치고 후배 여성들의 멘토를 자처하고 있습니다.
박유정 건축사가 앞으로 계획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자신의 이름을 건 건축사사무소를 열고, 저출생·고령화 도시를 위한 '에이징 인 플레이스' 공간과 정책 제안에 집중할 계획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