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의 '담보제공명령'이 남용 소송을 멈춰 세웠다. 서울의 한 남성이 경찰과 판사들을 상대로 30건이 넘는 손해배상 소송을 잇달아 제기했으나, 법원이 소송 비용 담보를 내라고 명령하자 올해 6월 이후 추가 소송이 멈췄다. www.donga.com이 29일 단독 보도했다.
이 남성의 소송 전쟁은 2024년 9월 서울 강동경찰서 조사실에서 시작됐다. 그는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며 수사관에게 자신을 '박사님'으로 불러달라고 요구했고, 조서에도 그렇게 기재해달라고 말했다. 수사관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조사는 중단됐다.
호칭 하나에 50억 원 손해배상 청구
이후 이 남성은 강동경찰서에 수사중단 사유가 담긴 수사보고서 등에 대해 정보공개를 청구했으나 경찰은 비공개로 결론을 내렸다. 그는 곧바로 국가를 상대로 50억 원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원치 않는 방식으로 불러 명예훼손적 표현을 당했고, 경찰공무원의 위법한 공무집행으로 정신적 고통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해 4월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수사관에게 '박사님'이라는 호칭을 요구할 법적 근거가 없고, 조사 중단에 위법행위가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판결이 나오자 꼬리를 무는 소송전이 시작됐다. 그는 자신의 사건을 맡았던 재판부를 상대로 재판 진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두 번째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이후 자신의 소송을 담당한 판사들과 그 대리인들을 상대로 최대 수십억 원 규모의 소송을 거듭 제기했다.
올해 6월 서울동부지법 판사를 상대로 한 34번째 소송이 제기됐고, 소송을 당한 판사는 22명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 5건은 법원이 담보제공명령을 내렸지만 원고가 담보를 내지 않아 변론도 열리기 전에 각하됐다. 추가 소송 제기는 이후 멈춘 상태다.
직무 관련 소송에 휘말린 판사 7년간 221명
판사들이 직무 관련 소송을 당하는 일은 갈수록 늘고 있다. 국민의힘 송석준 의원실이 대법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최근 7년간 직무 관련 소송을 당해 소송대리인 선임 등 '부당소송 지원'을 신청한 판사는 총 221명이었다. 2020년 24명, 2021년 13명에서 2022년 32명으로 늘었고, 지난해에는 48명까지 증가했다.
법왜곡죄가 시행된 올해는 10월 19일까지 41명이 부당소송 지원을 신청했다. 이 추세라면 연말에는 50명을 넘길 전망이다. 221명 가운데 소송이 종결된 153명의 사건은 강제조정으로 마무리된 2명을 빼면 모두 기각, 각하 또는 소 취하로 끝났다. 원고 청구가 받아들여진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
판사들의 부담은 어디서 오나
한 재경지법 부장판사는 소송이 제기되면 변론에 직접 나가지 않더라도 답변서 작성 등 필수 절차에 시간이 많이 소요돼 부담이 된다고 토로했다. 민사 소송에서 피고가 답변서를 내지 않으면 원고 주장을 자백한 것으로 간주되어, 재판부는 변론 없이 원고 승소 판결을 할 수 있다. 판사 개개인에게 대응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인 셈이다.
담보제공명령, 현행 제도에서 가장 효과적인 대응책
부담을 줄이려면 소송비용 담보제공명령 등 제도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민사소송법은 당초 원고가 국내에 주소지를 두지 않고 피고가 신청한 경우에만 담보제공명령을 내릴 수 있게 했다. 그러나 2010년 법 개정으로 '청구가 이유 없음이 명백한 때'에도 법원이 직권으로 담보제공명령을 내릴 수 있게 됐다. 원고가 담보를 내지 않으면 법원은 변론 없이 소를 각하할 수 있다.
법원행정처도 올해 8월 일선 판사들에게 배포한 '직무소송 지원·대응 매뉴얼'에서 담보제공명령을 현행 법령 아래 가장 효과적인 부당소송 대응책으로 꼽았다. 매뉴얼에는 이 밖에도 소송비용 지원, 소권 남용자에 대한 과태료 부과, 악성 고소·고발인에 대한 무고죄 고발 등이 대응 방안으로 담겼다.
다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과태료는 '소권 남용'으로 인정돼야 하는 등 요건이 까다로워 실제 부과된 사례가 드물다. 무고죄 고발 역시 고소·고발인과의 또 다른 갈등으로 번질 수 있어 판사들이 꺼리는 경우가 많다.
사법부가 판결이라는 본연의 임무에 집중하려면, 명백한 남용 소송을 조기에 걸러내는 제도적 장치가 실질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이번 사건에서 담보제공명령이 34건의 소송 사슬을 끊었다는 사실은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자주 묻는 질문
담보제공명령이란 무엇인가?
법원이 이유 없음이 명백한 소송의 원고에게 소송 비용에 해당하는 담보를 미리 내도록 명령하는 제도다. 원고가 담보를 내지 않으면 법원은 변론 없이 소를 각하할 수 있다.
판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 어떻게 되나?
판사는 답변서를 제출하는 등 대응 절차를 밟아야 한다. 최근 7년간 직무 관련 소송을 당한 판사는 221명이며, 종결된 사건 대부분은 원고 패소로 끝났다.
'박사님' 호칭 소송의 결과는?
서울중앙지법은 2025년 4월 수사관에게 '박사님' 호칭을 요구할 법적 근거가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