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천 년 고전의 힘, 질문하는 힘…김헌 교수가 완역한 '오뒷세이아'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 흥행이 불러온 고전 읽기 열풍 속에서, 서울대 김헌 교수가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오뒷세이아'를 22년 만에 완역해 펴냈다. 김 교수는 고전의 힘을 '질문하는 힘'이라 정의하며, AI 시대에 더욱 중요해진 질문의 역량을 강조한다.
22년의 번역 여정, 호메로스의 음악성을 살리다
김헌 교수는 2004년 출판사의 제안으로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 번역을 시작했다. 대학 강의와 연구 프로젝트로 바쁜 일정 속에서 번역은 더디게 진행됐고, 때로는 '정말 해낼 수 있을까'라는 회의감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22년의 시간이 흐른 끝에, 그는 가장 중요한 원칙을 세웠다.
그 원칙은 바로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최대한 그대로 살리자'는 것. 특히 서사시의 음악성을 살리기 위해 어순과 행수를 최대한 맞추려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일반적인 어순을 벗어난 도치된 문장이 자주 등장한다.
“잔치 손님들이 들어왔다, 신적인 왕의 집으로. 그들은 데려왔다, 가축들을, 가져왔다, 남자에게 좋은 포도주를. 빵을 그들에게 아름다운 면사포 두른 아내들이 보내왔다.”
김 교수는 “가독성이 떨어지더라도 도치의 파격은 평서문의 산문성을 벗어나 운문의 음악성을 살리는 데 유리하다”고 설명한다.
고대 그리스인의 세계관을 그대로 전하다
또 다른 특징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개념을 본뜻 그대로 번역한 점이다. 예를 들어, 다른 판본에서 '지혜'나 '분별력'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프레네스'를 김 교수는 '횡격막'으로 옮겼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지적 활동을 '횡격막을 쓴다'고 표현했으며, 이는 현대의 '머리를 쓴다'는 표현과 유사하다.
김 교수는 “호메로스 시대 언어의 의미 구조를 현대 독자의 가독성에 맞추면 호메로스의 인간관이나 세계관을 지워버리게 된다”며 “낯설고 어색해도 그 언어가 가진 생생한 의미 구조와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이 독자에 대한 배려”라고 강조했다.
놀런 감독의 '오디세이'에 보내는 경의
김 교수는 영화 '오디세이'를 두 차례 관람했다. 그는 “정말 몰입해서 봤고, 감독에게 경의를 표하는 마음이 생겼다”며 “영화를 통해 서양 고전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고전의 가치가 부각된 것이 고맙다”고 말했다.
그의 번역 철학은 CG를 배제하고 실사를 고집하는 놀런 감독의 촬영 철학과도 일맥상통한다. 두 사람 모두 원작의 본질을 최대한 살리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AI 시대, 고전이 주는 질문의 힘
김 교수는 고전의 힘을 '질문의 힘'이라고 단언한다. “AI 시대에 중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질문하는 능력입니다. 고전은 답을 주는 것보다 질문하는 역량을 키워줍니다.”
그는 “AI 시대가 되면서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힘이 더 중요해졌다”며 “고전에는 우리가 잊고 있던 문제들을 일깨워주는 힘이 있다”고 말했다. '오뒷세이아' 역시 단순한 모험담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내가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끝없이 던지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번역 작업은 이타카로의 귀환
김 교수는 '오뒷세이아' 번역 작업이 자신에게는 이타카로의 귀환과 같았다고 회상했다. “예전에는 고전 번역이 대상화된 고전을 또 다른 대상으로 만드는 작업이었다면, 이제는 그 작업 자체가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와 연결됐어요. 순간순간 제가 이타카를 찾아가는 오뒷세우스로 빙의되는 것 같더라고요.”
그는 미뤄뒀던 '일리아스' 번역에도 힘을 쏟고 있으며, 내년 말쯤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