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의 가을, 장맛과 풍경이 함께 익어가는 시간
처서가 지나고 나면 여행지를 고르기 좋은 계절이 돌아온다. 올가을 어디로 갈지 고민하는 이에게 전북 순창을 권한다. 고추장의 명성이 워낙 자자해 맛의 고장으로만 알기 쉽지만, 순창의 가을은 먹을거리로 끝나지 않는다. 지난 9월 1일에는 섬진강을 굽어보는 암벽 잔도가 다시 문을 열었고, 10월이면 장류축제가, 11월이면 애기단풍이 절정에 이른다. 양지바른 장독대에서 장이 익어가듯, 순창의 가을도 순서대로 익어간다.
순창의 가을, 왜 지금 주목해야 할까
순창은 전통 장류의 본고장으로, 그 역사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순창 고추장의 내력은 조선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무학대사가 머물던 만일사를 찾아가던 이성계가 길가 농가에서 맛본 장맛에 반해, 왕이 된 뒤 진상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809년 문헌 <규합총서>는 순창 고추장을 팔도의 명물로 꼽았고, 오늘날에는 지리적표시제에 등록돼 그 명성을 제도로도 인정받는다.
장맛의 역사와 현대적 체험을 한곳에서
순창읍 백산리 일대에는 순창발효테마파크와 순창장류박물관이 자리해 있다. 발효 미생물을 주제로 한 흔치 않은 테마파크인 순창발효테마파크는 2021년 문을 연 뒤 전시관과 놀이 시설을 꾸준히 확장해 왔다. 박물관에서 장의 역사를 먼저 훑고 나면 전시관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아이들은 음식 주제의 게임과 퀴즈, 실내 놀이 시설에 흠뻑 빠질 것이다. 비 오는 날에도 실내에서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전통 고추장 민속마을에서 만나는 장인들
이웃한 순창전통고추장민속마을은 순창군이 1997년 조성한 곳으로, 30여 가구가 대를 이어 장을 담근다. 집집마다 장독대가 가지런하고, 내려오는 비법이 달라 같은 고추장이라도 맛이 조금씩 다르다. 1976년부터 고추장을 담가 2015년 대한민국식품명인 제64호가 된 강순옥 씨도 이 마을에 있다. 생산자들의 고추장과 된장, 장아찌를 현장에서 바로 살 수 있어 여러 집을 돌며 견주어 보는 재미가 있다.
순창장류축제, 올해는 더 특별하다
10월 15일부터 나흘간 민속마을과 발효테마파크 일대에서 제21회 순창장류축제가 열린다. 문화체육관광부 문화관광축제이자 올해 예비 글로벌축제로도 선정된 행사다. 고추장 담그기와 메주 빚기 체험, 고추장 진상 행렬 재현이 볼거리를 더한다. 장 담그는 법을 제대로 배우고 싶다면 축제 기간에 열리는 장문화학교를 찾으면 된다. 순창이 한 해 중 가장 떠들썩한 나흘이니, 여행 날짜를 이에 맞춰 보는 것도 좋다.
직접 담그고, 불에 구워 먹는 순창의 맛
구경만으로 아쉽다면 직접 장을 담가 볼 차례다. 회문산 자락 구림면의 '순창고추장익는마을'은 전통 고추장 만들기를 누구나 따라 할 수 있게 풀어놓은 체험 마을이다. 조청에 소금을 고루 섞고 고춧가루와 메줏가루를 넣어 버무리면 끝. 과정은 단순하지만 재료는 깐깐하다. 고추는 섬진강 상류에서 키운 것을 쓰고, 메주는 고추장용으로만 따로 띄운다. 소금도 1년 동안 간수를 뺀 것만 쓴다. 체험은 예약이 필요하며, 인원이 적으면 온라인으로 파는 체험 키트를 활용해 숙소에서 만들어 볼 수도 있다.
장을 담그고 나면 순창의 한 끼, 고추장불고기가 기다린다. 고추장 양념에 재운 돼지고기를 석쇠에 얹어 불에 바로 구워내는 음식으로, 읍내 곳곳의 식당이 저마다의 손맛을 낸다. 2023년에는 순창군이 이원일 셰프와 협업해 미나리와 파를 더한 순창식 레시피를 선보이기도 했다.
하늘길에 올라 섬진강을 굽어보다
장을 챙겼으면 이제 산이다. 임실과 경계를 이루는 동계면의 용궐산은 산허리에 거대한 바위벽을 두른 모습으로 유명하다. 이 수직에 가까운 바위에 잔도를 낸 것이 용궐산 하늘길이다. 2023년 1096m로 늘어나 국내 최장급 산악 잔도가 됐고, 지난 8월 덱을 손보고 180m 구간에 그늘막을 더한 뒤 다시 문을 열었다.
본격 등산을 각오하지 않아도 된다. 용궐산자연휴양림 근처 들머리에서 15분쯤 오르면 잔도가 시작된다. 난간 너머로 장군목이라 불리는 섬진강 상류 협곡이 굽이치고, 강 건너로는 산줄기가 겹겹이 펼쳐진다. 일교차가 커지는 요즘이라면 강 안개가 걷혀 가는 이른 아침이 으뜸이다.
채계산 출렁다리, 흔들림 속의 풍경
잔도를 걸었다면 채계산으로 건너갈 차례다. 책을 차곡차곡 포갠 모양이라 책여산으로도 불리는 해발 342m의 산이다. 2020년 놓인 출렁다리는 주탑 하나 없이 270m를 가로지르며, 개통 당시 국내에서 가장 긴 무주탑 산악 현수교로 이름을 올렸다. 한가운데 서면 발밑은 최고 90m 허공이고, 눈앞으로는 섬진강과 적성뜰이 펼쳐진다. 건너편에서 조금 더 오르면 어드벤처 전망대가 나오고, 시야는 한층 넓어진다. 들판이 누렇게 익는 10월이면 한 번 더 찾을 만하다.
11월의 절정, 강천산의 애기단풍
순창의 가을은 강천산에서 끝을 맺는다. 1981년 국내에서 처음 군립공원으로 지정된 산이다. 매표소를 지나면 절벽을 타고 두 갈래로 쏟아지는 병풍폭포부터 만난다. 강천사를 거쳐 구장군폭포까지 2.5㎞ 남짓한 계곡 길은 고운 흙길이라 신발을 벗고 걷는 이가 많다. 계곡 안쪽에는 1980년에 걸린 높이 50m 현수교가 있고, 길 끝의 구장군폭포는 물을 끌어올려 만든 인공폭포로 두 줄기 물이 120m 높이에서 떨어진다. 잎이 유난히 작고 붉게 물드는 애기단풍 군락은 11월 중순 절정을 이룬다. 현수교에서 구장군폭포까지가 단풍이 가장 볼만한 구간이다.
순창의 가을은 장맛과 풍경이 함께 익어가는 시간이다. 서두를 것 없이 달력을 넘기며 하나씩 챙기다 보면, 어느새 순창의 가을이 온전히 내 것이 되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