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아에서 12년간 집권한 알렉산다르 부치치 대통령이 지난 10월 25일 총선에서 참패하며 실각하게 됐다. 그를 끌어내린 세력은 야당 정당이 아니라 지도부도 정당 조직도 없는 대학생 시민운동 단체 '학생명부'다.
학생명부는 이번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차지해 집권을 앞두고 있다. 정당이 아닌 시민단체가 원내 1당이 되는 사상 초유의 사례에 전 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아시아경제는 소종섭의 시사쇼에서 이번 선거 결과의 배경과 파장을 분석했다.
학생명부는 어떻게 원내 1당이 됐나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선거에 나가려면 법적 요건을 갖춘 정당에 소속되거나 무소속으로 출마해야 한다. 세르비아는 달랐다. 시민단체도 후보를 낼 수 있는 제도가 있었고, 이를 알리는 나라는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일부 유럽 국가 정도로 알려져 있다.
더 특이한 점은 학생명부 소속 인원 아무도 출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학생명부는 자체 여론조사와 지역 민심 수렴을 거쳐 각 지역 행정에 도움이 될 만한 인물 250여 명을 골라 후보로 추천했다. 후보 대부분은 농민, 의사, 기능공 등 정치 경험이 전혀 없는 일반 시민이었다.
그 결과가 원내 1당이었다. 더스쿠프는 세르비아 총선 결과 보도에서 학생명부가 250석 중 141석을 확보했다고 전했다. 연합뉴스TV도 현지시간 25일 총선 보도에서 학생명부가 집권 여당 세르비아진보당을 압도했다고 reported했다.
노비사드 참사에서 시작된 조직
학생명부의 역사는 짧다. 만들어진 지 2년밖에 되지 않았다. 2024년 11월 세르비아 북부 노비사드 기차역에서 콘크리트 캐노피가 무너져 16명이 숨지는 참사가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조직이 꾸려졌다.
사고 조사 과정에서 문제의 캐노피를 비롯한 공공인프라 부실공사 실태가 드러났다. 지방정부는 물론 중앙정부까지 얽힌 부정부패 스캔들이 잇달아 터졌고, 민생고가 깊었던 세르비아에서는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이후 세르비아 대학생 단체들이 연합해 학생명부라는 연대조직을 만들었고, 선거법에 따라 후보를 냈다가 예상과 달리 원내 1당이 됐다. 한겨레는 부치치 퇴장 소식을 전하며 기차역 참사 이후 이어진 반정부 시위를 돌파하기 위해 조기 총선이라는 승부수를 던졌지만 정권을 내주게 됐다고 짚었다.
부치치는 왜 무너졌나
부치치 대통령은 국내외 요인이 겹치며 무너진 것으로 분석된다. 국내적으로는 2014년 총리 취임 이후 사실상 독재정치를 펼쳤다. 언론 자유를 위축시켰고, 어용방송에 가까운 언론사를 잇따라 세웠으며, 권력형 부패 스캔들이 터져도 권력을 지켰다. 총리로 집권한 뒤 대통령이 됐고, 연임하며 임기를 늘렸다. 대통령 3선 연임을 금지한 헌법을 피하려고 이번에는 총리 후보로 총선에 나섰다가 참패했다.
대외적으로는 서방과 중국·러시아 사이에서 중립정책을 페다가 양쪽 모두와 척을 지며 권력을 잃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뒤에도 그는 강한 친러·친중 행보를 이어갔다. 전쟁 초반에는 대러 제재에 동참하지 않고 러시아 가스를 계속 수입하겠다며 서방과 맞서 국제적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세르비아는 EU 국가들에 둘러싸인 내륙국이다. EU 지원금 없이는 경제가 마비될 처지였고, EU 가입은 여야를 가리지 않은 국정 최고 과제가 됐다. 압력이 이어지자 부치치는 전쟁 중반부터 친서방으로 돌아섰다. 대러 제재에 동참했고, 러시아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 박탕에도 찬성해 180도 달라졌다. 러시아는 계속 반발하고 있다.
세르비아는 항구 없는 내륙국이라 미국산이나 중동산 가스를 들여올 수 없다. 러시아가 가스를 끊으면 한겨울에 인명 피해가 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결국 분명한 외교노선을 세우지 못하고 강대국에 휘둘리며 국내 인기가 떨어졌고, 독재정치와 임기 연장 꼼수가 겹치며 정치 신인들에게도 밀렸다는 분석이다.
유럽에 상륙한 Z세대 혁명
이번 세르비아 총선은 유럽 각국에 큰 충격을 줄 것으로 보인다. 다른 나라에서도 학생 시민단체가 후보를 낸 적은 있지만 대부분 기존 정당에 흡수됐고, 스스로 집권할 세력으로 크지는 못했다. 이번에는 학생명부가 원내 1당이 됐고, 내각 구성을 마치면 실제 집권이 시작된다.
지금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대학생 시위가 번지고 있는데, 이번 결과가 시위를 더 키울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각국 학생 시위 조직들은 학생명부의 승리에 크게 고무된 것으로 알려졌다.
우려도 크다. 이번 일은 2022년 스리랑카에서 시작된 이른바 '젠지(Z세대) 혁명'의 여파 가운데 하나로 분석된다. 그동안 젠지 혁명은 방글라데시, 네팔, 마다가스카르, 인도네시아 등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퍼졌지만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 Z세대가 장기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대안 정치체를 만들거나 국가 위기를 해결한 사례는 없고, 정치적 혼란만 커졌다는 지적이다.
다만 세르비아 학생명부는 국가 전복이나 대규모 봉기가 아니라 민주적 절차를 거쳐 집권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얼마나 잘 해낼지는 새로운 정치 실험으로 지켜봐야 한다는 분석이 많다.
기성 정치 실패의 경계신호
이번 집권은 선거법 제도와 관계없이 기성 정치권에 대한 실망감이 터져 나온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젠지 혁명도 여기서 출발했고, 유럽 극우정당의 득세에도 같은 실망감이 반영됐다. 독일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도 처음에는 대학생 학생운동 조직처럼 출발해 정당이 됐고, 지금은 원내 2당까지 올라섰다.
기존 중도우파·중도좌파 정당들이 20년 넘게 집권하며 기득권 세력이 됐고, 서민과 젊은층에서 너무 멀어진 것이 원인이라는 지적이다. 자신들의 목소리가 정치에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고 느낀 시민들이 다른 길을 찾는 것이다. 이 점에서 한국 정치권도 예외일 수 없다.
학생명부는 집권을 앞두고도 총리 인선조차 정하지 못했다. 독재를 막겠다는 취지로 평의회 형태를 택했고, 모든 안건을 회의를 거쳐 통과시키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 조직이 성공한 정치체제로 자리 잡으면, 다른 나라에서도 시민단체의 후보 공천을 허용하는 선거법 개정 요구가 힘을 얻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자주 묻는 질문
세르비아 학생명부란 무엇인가?
2024년 11월 노비사드 기차역 붕괴 참사를 계기로 만들어진 대학생 연대 조직이다. 지도부와 대표 없이 평의회 형태로 운영되며, 2026년 10월 25일 총선에서 원내 1당이 되어 집권을 앞두고 있다.
정당이 아닌 단체가 어떻게 선거에 나설 수 있나?
세르비아 선거법은 시민단체의 후보 공천을 허용한다.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일부 유럽 국가에서만 비슷한 제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치치 대통령은 왜 실각했나?
12년간의 사실상 독재정치, 부정부패 스캔들, 그리고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서 일관성 없이 오가던 외교 노선이 민심을 잃게 했다. 헌법상 3선 금지를 피하려 총리 후보로 나섰다가 참패하며 실각하게 됐다.
